여행기획&기록 250

[Buen camino] 단 일주일이면 어떠한가 싱그러운 바람만으로도 족하다

2009.11.08 칼즈-벨로라도 : 23km 초반부터 비다. 앞으로 삼일간 비가 온다는데 징하다. 오늘 중간중간 마을이 있으니 비가 심하게 내릴 경우 벨로라도 까지 무리해서 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 달 휴가를 신청하고 항공권을 발권할 때부터 지금까지 세세한 계획은 없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리턴일만 정해두고 카미노 길 위에서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할 생각이다. 카미노에 겨울은 이렇게 오고 나는 이제 서서히 카미노 여정을 마무리 해야겠다. 같이 일주일을 걷고, 홀로 일주일을 걷고, 또 일주일은 홀로 대도시를 여행하고 나머지 사흘은 유럽을 오가는데 시간을 쓸 것이다. 첫 번째 마을 그라농에서 카페 솔로 한 잔을 마시고부터 비바람에 발걸음을 옮기기도 힘들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빗..

[Buen camino] 카미노의 겨울은 비와 함께 온다

2009.11.07 나헤라-칼즈 : 21.2km 출발부터 비가 올 듯한 하늘이기에 초반부터 판쵸를 뒤집어 썼다. 오늘 길은 비교적 수월했다. 한시간 반 만에 아스포르 마을에 도착했다. 아침을 치즈와 빵과 함께 마치고 카페에 들어가 에스프레소 한잔을 마셨다. 작디 작은 잔에 설탕 가득 한 스푼 넣으면 쓰고 달콥 쌉싸름한 깊은 맛에 중독된다. 걷다가 카페가 보이면 몸은 자동 반사로 들어간다. 산길에 들어서자 빗발이 거세지고 바닥은 순식간에 질척거린다. 처음엔 물이 닿지 않도록 신경 쓰다가 발바닥부터 빗물이 들어차고 부터는 자포자기 심정이 되었다. 그냥 막 걸었다. 발은 시려워도 걷다보니 열기가 생기면서 견딜만해졌다. 손과 귀가 시려워서 장갑 모자, 갖고 있던 옷을 다 꺼내 입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막 겨..

[Buen camino] 그 이름 들어는 봤나, 퓨전 좁쌀 파스타 스프

2009.11.06 나바레테-나헤라 : 21km 어제밤 전화벨 소리에 깼는데 창문이 어찌나 잘 봉했던지 낮인지 밤인지 알 수가 없다. 그때가 12시. 한국에서 송교수님이 건 전화다. 한국에서 7시좀 넘어서니 교수님이 어지간히 일찍 아침을 시작하신다. 잘 다녀오라는 안부 메세지를 전하시는데 뭉클하다. 3년 후 이 길을 걷고 싶다고 하시는데 내가 선 경험자가 되었다. 다시 발바닥 통증과 근육통이 찾아온다. 물집에는 이제 피가 고였다. 그냥 호텔방에서 퍼지기로 했다. 조금 늦게 출발하면 어떠하리오. 오늘 걸어야 할 킬로는 16 킬로미터로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해가 중천에 뜰때까지 뒤비적 거리다 나왔다. 비는 또 추적추적 내리고 아흥~~ 판초를 뒤집어 썼다. 안녕하세요? 뒤를 돌아보니 거북..

[Buen camino] 때로는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어

2009.11.05 비아나-나바레테 : 21.5km 8시에 기상. 나의 늦잠에는 이유가 있다. 아래층 침대에서 머문 코골이 부자는 최고의 가창력을 자랑한다. 둘이서 번갈아 박자를 맞춰가며 밤새 리듬을 탔다. 귀마개도 소용없었다. 아침, 그들은 너무도 개운한 잠을 자고 난 듯 마알간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나는 눈에 핏발이 선 채로 욱하는 맘을 달래야했다. 출발은 조금 쌀쌀. 로고르뇨로 향하는 길은 대체적으로 평탄했다. 2시간 만에 로고르뇨에 도착했고 바에 들어가 또띠아와 커피를 마셨다. 또띠아는 생감자를 달걀과 함께 오랜시간 불에익힌 스페인 대표요리다. 로고르뇨는 조금 큰 도시였지만 공장도 많고, 여기저기 공사중인 건축물들도 눈에 띄고 대체적으로 낭만은 덜 한 도시였다. 느낌이 좋았다면 로고르뇨에 머물 ..

[Buen camino] 그저 지나가는 바람

2009.11.04 로스아르코스-비아나 : 19.5km 내가 눈 뜬 시간은 7시 30분. 점점 기상시간이 늦어진다. 조금씩 적응해가는 덕이겠지. 관광객 모드로 돌아간 태권브이와 광년이는 늦잠을 더 즐기고 싶어했으나, 나의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깼다. 지금까지 일주일을 함께 걸었다면, 앞으로 일주일 이상은 혼자 걸을 것이다. 아침부터 비는 부슬부슬 내렸다. 이런 마른 땅 밟기도 힘든 마당에 진탕길을 걷게 생겼군. 짐을 1g이라도 줄이기 위해 배낭 커버를 부쳐버렸기에 판초를 쓰고 걸을 수밖에 없다. 기다란 자락이 참으로 걸리적거린다. 산길을 따라 걸으며 먹구름이 수없이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하며 비를 뿌리고 거두고, 나 또한 땀이 차오르는 판쵸를 벗었다 입었다 해야 했다. 비보다 더 성가신 것은 신발에 붙..

[Buen camino] 하룻쯤 더 머물러도 좋아

2009.11.03 어젯밤 파티를 같이 보낸 사라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오후의 한가로운 때를 즐기고 있다. 아침에 빨래도 하고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식재료도 사오고 동네도 어슬렁거리다. 한국인 남자사람이 쉬어간다며 들어왔다. 문득 내 노란 슬리퍼에 시선을 두더니 독일인 마크 이야기를 한다. 노란 신발의 한국 여자 이야기를 했나보다. 첫날 피레네 산맥을 못 넘고 있는 나를 경찰에 신고해 준 친구다. 소문이 거기까지 퍼졌나? 카미노에서 나의 정체는 '노란슬리퍼를 신고 피레네에서 퍼졌던 그래서 실종신고됐던 한국여자'가 된 것이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느리지만 잘 간다. 빨래 말리고 식사하고 발의 물집 처리하는데 벌써 한 시다. 아 이곳에서의 시간은 느리지만 잘 간다. 앞으로 남은 2주일을 보낼 계획을 세워보지만..

[Buen camino] 드디어 친구가 생기다

2009.11.02 에스텔라 - 로스아르코스 : 21.8km 어제 비가 온 뒤 제법 쌀쌀해진 기온으로 상쾌한 걷기가 시작되었다. 새끼발가락 물집을 실리콘 밴드로 동여매고 만반의 준비로 걷기 시작했다. 날씨가 변덕이다. 첫 번째 고개를 넘어서자 먹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내리쬔다. 황토 빛 땅이 환하게 개고 맑은 하늘이 드러난다. 반가운 산티아고 길의 날씨다. 두 번째 고개를 넘어서자 바람이 마구 불기 시작한다. 갈대길 사이로 갈대보다 더 흔들리는 바람이다. 그리고 슬슬 춥다. 땀이 나기도 전에 식어버렸다. 그래도 비를 맞고 걷게 되지 않음에 감사하나 어찌나 바람이 세게 부는지 발걸음을 옮기기도 힘이 들 정도다. 이때 나의 장갑과 귀가리개가 딸린 모자가 위력을 발한다. 물론 바람막이가 되어줄 나의 주황색 점퍼..

[Buen camino] 불타는 발바닥을 지긋이 즈려밟고

2009.11.01 푸엔테 라 레이냐-에스텔라 : 22.4km 오늘은 불나는 발바닥과의 투쟁기가 되겠다. 발바닥 뒷굼치 굳은살에 자리 잡은 두터운 물집, 전체적으로 발을 조이는 등산화 덕에 살을 파고드는 엄지발톱의 고통. 그리고 자꾸 새로이 잡히는 발바닥의 부분적인 물집들. 가장 힘든 건 발을 디딜 때 마다 느껴지는 발바닥 통증이다. 발바닥 뼈로 바로 다가오는 통증들. 오늘은 일행들 중에서 맨 꼴찌로 걷곤 했다. 가끔은 걷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만사가 귀찮다. 발바닥만 괜찮다면 14 킬로의 짐도 견딜 수 있다. 불타는 발바닥을 느끼며 신선놀음 하던 나는 드디어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나 왜 여기 있는거니?? 발바닥에 물집까지 잡혀가면서 이곳에서 떠날 생각도 못하고 있는 나는 뭔가. 출발 기세대로라면 '즐..

[Buen camino] 나의 피로회복제 코카콜라, 에스프레소

2009.10.31 팜플로냐-레이나 : 23.5km 오늘은 페르돈 고개를 넘어야 한다. 길은 평탄하고 오늘의 날씨는 덥다. 수확을 다 끝낸 밭은 황토빛 일색이고 하늘은 맑다. 어제 알베르게에서 눈인사를 나눈 순례자와 말을 걸어온다. 호기심이 가득 담은 표정으로. 이 길을 걷는 스페인 사람들은 몹시도 궁금해했다. 동양 여자들이 어떻게 알고 이곳 까지 왔는지. 너는 이 길을 왜 걷니? 만나는 사람들마다 물어오지만, 나는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걷고 싶어서라는 늘 하던 말 대신 오늘은 다른 말을 해본다. "파울로 코엘료의 책을 봤어. 그리고 이곳으로 왔지." 한 달의 휴가를 내고 생활하기도 빠듯한 월급을 쪼개서 이곳으로 온 이유? '그냥' 대신에 이유를 꼭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700유로..

[Buen camino] 이것이 진짜 여행이렸다

2009.10.30 수비리-팜플로냐 : 21km 드디어 처음 제대로 걸어보는 날이다. 공립 알베르게 대산 10유로나 하는 사설 알베르게에서 묵었다. 만족도는 높았다. 토마토 한 알과 카페 솔로 그랑데 한 잔으로 가볍게 시작. 아침에는 이슬에 젖기 때문에 바람막이용 점퍼를 입어주어야 한다. 핑크 자켓은 항공좌석에서 놓고 내리고 내게 남은 유일한 바람막이용 점퍼는 여박 점퍼. 주황색 옷은 어디에다 내어놓아도 튄다. 산에서 실종되어도 가장먼저 발견될듯. 인적 없는 숲길, 아침이슬에 옷깃을 스키며 산길을 따라 걸음을 옮긴다. 중간에 검은 고양이가 튀어나와 따라온다. 야옹대는 폼이 영 애태우는 걸 보니 녀석이 오랫동안 굶었던 것 같다. 갖고 있던 바게트 빵을 좀 찢어서 던져 주었다. 이틀 전 사두고 거의 잊었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