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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en camino] 그저 지나가는 바람

코치 박현진 2009. 12. 5. 18:10

2009.11.04
로스아르코스-비아나 : 19.5km


내가 눈 뜬 시간은 7시 30분.
점점 기상시간이 늦어진다. 조금씩 적응해가는 덕이겠지.
관광객 모드로 돌아간 태권브이와 광년이는 늦잠을 더 즐기고 싶어했으나,
나의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깼다.

지금까지 일주일을 함께 걸었다면, 앞으로 일주일 이상은 혼자 걸을 것이다.
아침부터 비는 부슬부슬 내렸다. 이런 마른 땅 밟기도 힘든 마당에 진탕길을 걷게 생겼군.
짐을 1g이라도 줄이기 위해 배낭 커버를 부쳐버렸기에 판초를 쓰고 걸을 수밖에 없다.
기다란 자락이 참으로 걸리적거린다.
산길을 따라 걸으며 먹구름이 수없이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하며 비를 뿌리고 거두고,
나 또한 땀이 차오르는 판쵸를 벗었다 입었다 해야 했다.



비보다 더 성가신 것은 신발에 붙어대는 진흙이다.
양발에 1kg씩은 더해져서 발걸음을 붙잡는다.
먹구름의 움직임을 따라 비구름을 좀 지나니 예상하게 된다.
재밌는 사실 하나.
조금 전에 내 앞을 가로질러간 독일인 막스와 그의 개.
다른 건 몰라도 막스가 간 길은 확실히 눈에 띈다.
진흙길에 개 발 자국이 너무도 선명하게 찍혀있기 때문이다.
무수한 신발 자국 사이사이 강아지 발자국 찾아 걸음 하는 것도 재밌었다.
오늘은 평탄한 길이라 큰 어려움은 없었고, 쉬는 시간도 길지 않았다.
어제 하루종일 에너지를 절약한 덕분 같다. 

알베르게에 도착한건 2시 40분. 3시부터 문을 연다고 써 있다.
설마 이 동에 딱 하나 있는 알베르게인데, 문 닫은 건 아니겠지.

모니카. 아까 걸어올 때 내게 길을 물었던 그녀를 다시 만났다.
알베르게가 문을 열때까지 기다리겠다며 건너에 있는 모니카에게 물었다.
"is there anything?"
"just... wind."
그렇게 둘이 앉아 바람과 햇살을 감상했다.
마드리드에 사는 스페인인 그녀는 조용조용하고 또박한 말투를 가졌다.
그리고 스페인어를 통역해주는 통역사 역할도 했다.
참 신기하게도 인종도 다르고 잠시 만난 사이지만 몇 마디 말을 하고나면 성격과 개성이 파악이 된다.
그녀는 꽤 친절하고 지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정하다.




▲ 그저 바람이 지나갈 뿐...


여기서 몇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


#1
알베르게 옆, 성당 앞에 공원이 하나있다.
이곳에 동네 사람들이 찾아오는 모양인데 80세 정도의 할아버지가 왔다.
그리고 사람이 그리웠는지 작은 벤치에 앉아있던 나를 손수 끌고 양지바른 곳에 앉히는 거였다.
자꾸 말을 거는데 이건 대답을 할 수가 있어야지...

#2

모니카가 빵과 치즈를 나눠주었다.
배도 고프고 해서 먹고 있는데, 동네 청년들이 강아지와  산책을 나온 모양이다.
강아지가 발발 거리며 오더니 냅다 치즈를 덥석 물고 가버렸다.
그거 꽤 큰 덩어리였는데... 청년도 웃고, 치즈를 갑자기 빼앗긴 모니카도 웃고...

#3

사람이 그리운 할아버지 모니카와 몇 마디 말을 하고 나에게 통역도 해주고...갑자기 웃는다.
할아버지가 말 잘 통한다고 청혼해 왔다고.

#4

알베르게 앞에서 기다리던 노인 한 분. 72세인데 지금 일 년에 한번씩 10번 산티아고를 걷는단다.
물론 이 내용은 모니카가 영어로 옮겨준 내용이다.
근데 가만히 보니깐 이분 좀 정상이 아닌 것 같다.
둘이 에스파냐어로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가 더 이상 호응을 안 하고 나와함께 차나 마시러 가자고한다.    
알베르게에 들어와서 보니 팬티바람으로 온 군데를 휘젓고 다닌다.
정신사납다. 씨끄럽다....

#5

"친구들이 그러는데 비아나 이 마을은 사람들이 좀 이상하다고 했어.
그냥 좀 다른거 같다고. 나도 오늘 청혼을 받질 않나, 10번씩 걸어다니는 노인네가 있질 않나...
게다가 이 호텔 레스토랑은 우리 같은 순례자 옷차림을 싫어하는 모양이야. 친절하지 않아."
"특별히 그런 이유라도 있을까?"
"아마 바람이 불어서일거래. 이 지역 바람은 좀 다른가봐."
"이 동네 오는 내내 날씨도 참 스트레인지 했어. 그치?"
"응"


저녁은 간단히 점심에 먹고 남은 바게트에 츄라스와 치즈를 사서 토마토를 썰어 끼워먹었다.
역시 발 부상과 피부건조함으로 추가비용이 는다.
모이스쳐 로션 3유로와 콤피드 발가락용이 5유로 들었다.

홀로 걸을 첫날 기념으로 마을을 산책하며 성당에도 들러보다.
그리고 바에서 여유를 즐기면서 산미구엘 맥주 한잔 마셨다.
홀로된 첫 날의 낭만은 알콜과 함께.



2009 santiago de compost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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