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들고부터 나의 주거환경은 늘 아파트였다. 열살 무렵까지는 일반주택 2층을 넘기지 않았다. 첫 아파트에 대한 기억은 공포였다. 열 살 무렵이었는데 길고 빽빽한 고층 건물로 둘러싸인 공간에 서 있었다. 목이 부러지도록 고개를 젖혔더니 하얀 건물이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아찔한 높이에 적잖이 당황했던것 같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높은 층 어느 한칸에서 내가 살게 될 거란 점이었다. 게다가 17단지까지 구획된 공간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건물 전면에 표시된 숫자가 아니었던들 단지 구분이나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성인이 되어 내가 살 곳은 내가 선택할 수 있을 즈음 나는 아파트를 피해 주택가에 둥지를 틀었다. 여기에는 아파트에는 없는 환경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골목’이다. 그때부터 틈나면 골목을 돌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내 뒤로 남산타워가 보인다. 랜드마크이다 보니 이 주변에서는 어디로 보나 남산타워가 보인다. 너무했다. 서울의 상징 남산타워를 그렇게 무시했다니.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지금까지 살았음에도 서울촌사람인 나는 용산구에 무슨 동네가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용산구에 사는 내 편의를 봐준다며 정한 약속장소가 후암동이었고 그 동네의 존재조차 몰랐던 나는 그렇게 '후암동'에 갔다. 마을버스를 타고 끝도 없이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갔다. 한참 올라가면 거기에 남산타워가 내려다보고 있다. 해가 지고 발아래로 야경이 펼쳐지니 끝내주게 멋있었다. 이런 길을 모르고 지하로만 이동했던 무심함이 아쉬웠다.
오늘 점심시간에는 남다를 프로젝트를 하기로 했다. 한 시간은 '밥'의 집착에서 벗어나 후암동 런치타임투어를 떠나자. ‘런치타임투어’ 프로젝트 이름만 거창하지 별거 없다. 내가 사는 길 뒤로 보이는 길을 그냥 선택해서 골목골목 걸어보는 거다. 원칙은 간단하게 정했다. 길은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갈 것. 지도는 보지 말 것. 목적지를 정하지 말 것. 길을 잃어도 당황하지 말 것. 택시 타면 되니까.
예상대로 후암동의 뒷골목은 새로운 길이었다. 가을 낙엽을 긁어 태울만한 마당이 딸린 저택도 있었고 시멘트로 대충 발린 채로 문과 창문만으로 겨우 집이라는 것을 인식하게끔 하는 집도 있었다.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만한 통로도 있었고, 아슬아슬한 보폭의 계단도 있었다. 학교, 병원, 연구소, 목욕탕…. 거리마다 동네의 다양한 모습이 보였다. 삼십여 분 발길 가는 데로 다녔을까, 한참을 올라간 느낌이 들 때 나는 드디어 길을 잃었다. 남산타워는 조금 더 가까워졌고 코앞에는 어마어마한 높이의 계단이 있었고 (나중에 찾아보니 이름 하여 후암동 108계단이라고 한다.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의 배경이 되기도 했나 보다.) 계단을 다 오르고 또 언덕을 넘고 나니 더는 올라갈 데가 없었다. 점심시간 10분을 앞두고 물었다. '여기가 어디에요?' '해방촌 오거린데요.' 순간 정신이 몽롱해진다. 21세기 한복판에 해방, 촌 이라는 어색한 울림. 나는 어찌 어찌하여 해방촌에 와 있는 거다. 해방촌이 지척에 있었던 거구나. 서둘러 택시를 탔다. 50분의 산책이 무색하게 택시는 오 분 만에 평지로 내려왔다.
점심, 낯선 여행을 떠나보라. 나처럼 새로운 공간을 파악한다면 좋겠지만, 익숙한 거리라도 다른 길로 걸어보라. 골목 안 일상적인 풍경은 이 시간만큼은 여행지가 된다. 이렇게 헤매다가 마약을 풀어 만들었다는 마약 떡볶이집에서 떡볶이를 맛보거나 우연하게 드라마 촬영지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일상탈출의 거대한 결심도 아니고 소박하게 점심 한 끼와 바꿨을 뿐이다. 늘 먹던 밥과 교환한 것치곤 꽤 신선한 경험 아닌가.
글, 사진 박현진 (www.senti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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