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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여행칼럼

[월간 VIVID BNT] 지루한 일상, 그녀가 도망갔다


지루한 일상, 그녀가 도망갔다
 
운명이었다. 수천 마일을 비행한 후 그를 만났다. 빳빳하게 다려입은 셔츠가 땀에 젖어 흐느적거린다. 얼굴 가득 세로 주름을 만들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저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다. 약간의 알코올이 그를 기분좋게 했다. 동이 밝아올 때쯤, 내 손등에 키스를 얹는 금발머리 남자는 나에게 속삭인다. 어느 정도 예감한 나는 그만 반해버린다. 순간 내 인생의 어느 부분이 변하는 것을 느꼈다.
 
여기는 바르셀로나. 일상이 지루해 죽겠을 무렵 나를 구원해줄 비행기 티켓을 쥐고 날아왔다. 도시 자체가 예술이라는 가우디의 냄새를 맡으며 돌아다닌다. 어떤 세부적인 계획은 세우지 않는다. 일상에서는 늘 계획을 세워야 했으니까 이곳에서만큼은 그런 것쯤 가뿐히 무시한다. 설혹 길을 잃으면 택시타지 뭐. 이런 심산으로 내키는대로 아무 버스나 탄다. 저 멀리 바다가 보이자 정류장에서 내린다. 해안을 따라  길게 늘어선 선베드에 반라의 차림으로 누운 남녀 사이를 걸으며 해변의 여유를 만끽한다. 배에 식스팩을 장착한 근육남들이 망아지처럼 뛰노는 이곳은 바르셀로나 네타 구역이다.
일단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이곳에서 저녁까지 보내기로 한다. 해가 저물어가자 나의 배꼽시계도 요란한 알람을 울린다. 레스토랑을 찾아 주변을 돌아본다. 낮의 한가로운 시간에 간단한 음료를 팔던 카페도 저녁 식사 준비에 열을 올린다. 자세히 살펴보니 낮에는 카페, 저녁은 다이닝, 그 이후로는 클럽으로 변신하는 곳이다. 이곳이 바로 가이드북에서 언듯 읽었던 바르셀로나 클럽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우연하게 발견한 이 곳 이왕이면 클럽 활동의 최고의 시간 새벽까지 있어보기로 한다. 해가 저물어가면 하나둘 기어나오는 사람들, 쿵쾅쿵쾅 음악과 함께 거리는 흥분에 휩싸인다. 낮에 태양 아래 널부러져 있던 사람들이 꽃단장을 하고 다시 나타난다. 어느 클럽에 떠밀리듯 들어갔다. 잠시 넋 놓고 있었더니 거짓말 조금 보태 조선 반만 한 엉덩이에 의해 귀퉁이로 밀려났다. 우와, 이 사람들 지들끼리 신났구나. 현란한 조명과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음악소리에 눈과 귀가 적응하길 한참을 기다리니 주변 상황이 들어온다.
엉덩이의 주인공이 열광하던 것은 바로 음악. 한쪽 부스 위에 볼륨과 리듬으로 분위기를 떡주무르듯 하는 DJ가 보인다. 그때부터 내 시선은 그에게 꽃힌 채였다. 그가 특별히 잘생겨서도 아니고 그가 만들어내는 음악에 감탄해서도 아니다. 다만 내가 그토록 신기하게 바라본 건 몇 시간 동안 입가에서 사라지지 않는 미소 하나였다. 마치 행복해 죽겠다는 그 표정. 공간 안의 분위기를 만들어내야 하는 책임자로서의 위엄도 없고,  아티스트가 종종 보이는 나르시스적 도취감도 없이. 스스로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에 행복을 느끼는 표정. 저런 표정을 나는 얼마나 오랫만에 봤던가. 자유로운 복장 이라고 하기엔 깔끔하게 다려입은 화이트 셔츠가 이질적이기까지 했다. 마치 턱시도를 입고 야구장을 찾은 것 같은. 그런 저런 잡생각. 훌쩍. 영업시간 종료다.
 
그날 하루의 우연한 발견에 스스로 도취되어 그에게 다가가 내가 받은 감동을 고스란히 전한다. 오늘 하루도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마무리 짓고 있는 그가 매우 고마워하며 말한다.
‘Thank you, I love my job!’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듣고 잠시 멍하다. 그 말을 하는 얼굴이 진정한 행복으로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토록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하면서도 한편으로 나는 몇 년 전의 내 모습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일이 너무 즐거워 주말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던 한때의 내 모습. 지루한 일상에 가려 그렇게 사랑하던 내 일의 소중함을 잠시 유보했던 것을 반성한다. 여행경비는 이 한마디를 듣기 위해 지불한 것이다. 
누군가의 한마디가 내 문제를 깨끗이 해결할 때가 있다. 일상에 지친 그대여, 가끔 도망가자. 어디든 좋다. 누굴 만나도 좋다. 거기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자극이 될 것이다.
 



 

이글은 김경호의 BNT News International 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