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다움 인터뷰

[센티의 With Me Lab] 용기를 주는 레시피 만들기 with 'W'

코치 박현진 2012. 2. 12. 21:43




센티의 WithmeLAB.
'용기를 주는 레시피‘ 만들기 프로젝트

본인 이유도 모른 채 그냥 끌려서 떠난 산티아고. 생전처음 하루 동안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고 기절하듯 잠들어도 보고, 낯선 환경에서 말 안 통하는 사람들과 부딛껴도 보고. 물집 잡힌 발에 굳은살 생기자 드디어 육체적인 고통과는 별개로 생각이 정리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 굳은살이 구원이 되는 신기한 경험도 하고, 이 경험들이 너무 소중해 공유하고 싶어 블로그에 글을 쓰다가 문의가 하나둘 들어와 웹사이트를 만들어 상담소를 운영하고 결국 여행상품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정말 신기하게도 산티아고의 힘이다. 나는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 엽서를 만들었고(주술적 의미가 들어간^^)
회사의 인프라를 활용해 상품화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다녀온 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표현하고자 한 욕구는 결국 공유하고 싶은 욕망이었다.
그래서 하나둘 센티를 통해 다녀온 고객들을 캐스팅하기로 했다. 위드 미 랩 센티의 인터뷰에서. 이곳에서 그들이 가슴속에 담아온 산티아고의 조각들을 모아보기로 했다. 이 이야기가 다음 사람을 위한 용기를 주는 레시피로 작용하기를 바라면서.



‘저... 이걸 가져왔어요.’
인터뷰 장소로 온 W가 인사를 마치자마자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요즘 유행하는 사진 앨범이다. 웹사이트에서 사용자가 사진을 업로드해서 편집을 하면 그대로 책으로 제작되어 나오는 시스템. 신혼여행 앨범, 아이들 백일 사진 등 응용을 많이 하지만 가장 흔히 하는 것이 여행기록을 담은 내용이다.
‘9명의 사람들과 시작과 끝을 같이했어요. 그 친구들이 만들어서 선물로 줬어요. 너무 소중한 인연이에요.’
오늘 만난 W. (실명과 사진을 원치 않았으므로 W로 기재한다.)

‘올해는 나 스스로 나에게 준 안식년이예요. 10년 열심히 일했으니까.’
고객들 중 하필 그녀에게 인터뷰를 청한 건 바로 ‘안식년’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나는 그녀의 이름과 나잇대. 그리고 오래 일을 했기에 안식년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이년 전 처음 사무실로 찾아왔을 때 그녀의 인상은 열심히 살아온 인생에 한번은 쉼표를 찍으려는 자의 홀가분함과 해외로 나가기를 즐겨하지 않은 자의 혼란스러움이 교차했다. 그녀는 해외를 나가기를 싫어했던 사람이 한 달여의 여행을 그것도 짐을 지고 떠나야 하는 여행을 선택했기에 좀 더 무모한 도전이라고 생각했었고, 나는 여기 더한 사람도 갔다 왔다고 다 해결 된다며 (다들 무모하다고 말렸다던) 그녀의 결정에 용기를 보탰다.

지난 번 인터뷰 이후로 질문을 별달리 준비하지 않기로했다. 첫 인사를 나누면 대화는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된다. 이미 수다 떨 주제는 마련되었고 두 번째 만난 사이라고 하기엔 참 소소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나는 이것이 정말 신기하다. 이번에는 그냥 ‘수다’를 떨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사진첩의 동지들로 이야기가 흘렀다. 세계여행을 계획한 30대의 미혼 여성 친구 둘, 60대의 은퇴한 어르신과 20대의 아들, 철저한 기획파 남성, 그리고 자기관리가 철저한 여성, 누구의 아내 엄마의 이름을 떠나 개인의 삶으로 걸어온 여인, 20대 초반의 혈기로 준비 없이 떠나온 배려 깊은 청년 그리고 청년만큼이나 무모하게 즉흥적으로 떠난 W. 





산티아고 길에서 도움을 엄청 받았어요.
처음부터 민폐였어요. 걸어본 적도 없고 체력도 강하지 않은 상태에서 8명의 보폭을 맞추기는 무리였죠. 그래 떨어져 나와야겠다고 생각을 했죠. 근데 이 사람들이 너무 착한 거예요. 어떻게든 나를 데리고 가려고 하는데 나는 그게 또 너무 미안한 거예요. 어떻게 나를 마음 아프지 않게 버릴 수 있게 할까. 밤새 고민을 하다가 아침에 침대에서 안 일어났어요. 난 도저히 갈수 없는 상태라는걸 보여줬죠. 그런데도 사람들이 하나같이 못 떠나는 거예요. 걱정 되서. 결정적으로 제가 지도가 없었거든요. 짐을 줄인다는 생각에 버려서는 안 될 지도도 버려 버린 거예요. 그러니 이 사람들이 보기에 얼마나 제가 어리숙했겠어요.

그래서 다음날 혼자 떠나신 거예요?

자꾸 안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내고 걷는데 그날따라 비가 내리고 택시도 없는 거예요. 겨우 걸어서, 제가 한 번에 알베르게를 찾아간 적이 없어요. 엉뚱한데 갔다가 아 아닌가봐 이러고 나와요.(웃음) 가까스로 알베르게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일행을 만난 거예요. 다들 비가 와서 많이 못 걷기도 했고 나를 두고 가는 게 마음도 무겁고 걸어지지도 않더래요. 그때부터 이건 운명이다. 각자에 페이스에 맞게 걷되 낙오 없이 끝까지 같이 가자가 된 거죠.

그룹이 참 재미났을 것 같아요. 연령대도 그렇고.

등을 보여주는 어르신이 있었어요. 제가 하도 못 걸으니깐 어르신이 한참 걷고 나면 제가 저 멀리 점으로 보인대요. 그러면 또 안가고 기다리세요. 내 등이 보여야 따라올 수 있다고. 그렇게 맞춰 주셨어요.
20대, 30대, 40대, 50대를 다 사셨잖아요. 이미 그 나이대의 생각들을 아시고 또 아닌 길로 갈수 있는데 그걸 다 지켜보시고 맞춰주세요. 그 나이 대는 그렇게 하게 되어있는 거라면서. 길은 어떻게든 목적지에는 가게 되었어요. 무얼 보고 가느냐. 이게 중요한 거라는 걸 알려주신 분이에요.
젊은 사람들은 그냥 목표만 보고 간대요. 젊은 사람은 빨리 걷는 게 뿌듯한 거죠. 그러나 중년은 내려갈 준비도 해야 한 대요. 그러니깐 여유를 가지고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밤이 떨어진 걸 보고 포도도 따먹고 그렇게 느끼면서 걸으라고 하셨죠. 그러니깐 늦게 가는 게 억울할 게 하나 없는 거에요. 저는 제일 느렸기 때문에 유일하게 노을을 보는 사람이었을걸요.
800km를 걸으려던 게 아니었어요. 근데 걸었지. 어르신 덕분에 참 많은걸 깨달았어요. 나는 떠나는 것만 준비했지 어떻게 걸을까를 마음을 어떻게 먹을까 까지는 생각을 못했어요. 많은 조언과 이야기를 많이 해주신 분이죠. 



나는 부족한 걸 다 보여줘요.
저는 가장 좋을 때 항상 나와요. 결정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고 해요. 성급하지 않게. 공돌이였고, 형부가 내 멘토였어요. 과학도도 환경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에 폐기물 연구소 쪽으로 갔어요. 그런데 연구소는 안생기고... 일단 전문 기자로 활동을 했죠. 공학도긴 하니깐 기자들이 싫어하는 각종 세미나는 제가 좋아서 가고... 기사도 선배들이 좀 주고... 그랬죠. 거기서도 엄청 도움을 받았어요. 바라던 연구소는 안 생기고 더 다닐 수는 있었지만 원하던 길이 아니니 나왔어요. 

박수칠 때 떠나는 스타일이네요.

이직을 했었고, 사장이 첫 지시를 내렸는데 조달청 가서 멀 해오라는 거예요. 일단 조달청에 가서 수위아저씨를 찾다가 안내하시는 아저씬가 하고 지나가는 아저씨한테 갔어요. 
‘저기요, 첫 출근인데요, 처음 사장님이 시킨 일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라고 했더니 그 아저씨가 저 안쪽에 가서 멀 챙겨주더라고요. 그걸 회사에 냈더니 사장이 좀 제대로 해 왔구나 하더라고요. 그 뒤로 무슨 일 있거나 궁금한 일 생기면 전화를 해서 정보 받아오고 그랬어요. 다들 내가 그분과 통화해서 얻은 정보로 보고서 쓰고 그러면 놀라는 거예요. 근데 알고 보니 그분이 사무관인가 엄청 높은 직급의 사람이었어요.
난 그냥 수위 아저씬 줄 알았는데... 높은 사람이래. 너는 서열 모르니? 전 모르는데요. 진짜 그렇게 높은 거예요? (웃음) 저는 그렇게 한 거예요. 저는 늘 그런 거예요. 나중에 그분은 신문에도 나오고 엄청 높아졌더라고요.
첫 월급을 타고 그분을 찾아갔어요. 맛있는 거 대접해드리고 싶다고 했더니 너가 무슨 돈이 있냐면서 칼국수 사달라는 거예요. 결국 칼국수를 사드렸어요.
프로젝트성 작업이 많았어요. 저는 거짓말은 못하니깐 그냥 솔직하게 말해요. 너무 어리숙 하니까 업계 사람들이 다 도와줘요. 입찰을 들어가면 그냥 솔직하게 다 말해요. 그냥 계약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신기한 거였죠. 일은 재밌는데 너무 과한 거예요. 과로로 입원할 정도로. 그래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났으니까 떠나야겠다. 했죠.


이런 이야기까지 내가 왜 하는 거죠?

7년을 따라다닌 남자애랑 결혼을 해야겠다 했는데, 그 친구랑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개인적인 일이나 다음 이야기를 위해 사랑했던 이야기를 사정만 적는다.
사랑한번 진하게 못한 나는 이 이야기가 가슴이 아팠다. 어쩌면 그런 감정이 부럽기도 해서 혹은 상실감에.) 



무슨 페로몬을 뿌린 거예요. 이런이 야기까지 하게 하고. 이상해 오늘..
머핀 드시고 저는 커피를 가져올게요.
잠시 휴식을 가져요 ^^

(이어서)
사랑의 상처도 있고 해서 도피처로 대학원을 갔어요. 남들이 안 쓰는 주제의 논문을 써서 상도 받고 유학도 쉽게 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외국이잖아요. 나는 외국이 정말 싫거든요. 그래서 유학을 포기했어요.
그러다가 학원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친구의 말에 학교 다닐 때 아르바이트로 학비도 벌었는데 싶어서 학원으로 간 거예요. 거기서도 원장님을 잘 만났어요. 자기 수업의 반을 내어주고 저는 또 트레이닝을 한 거죠. 수학강사를 했어요.
(센티 여기서 잠시 움찔한다. 인수분해에서 포기한 사람으로서 W샘이 갑자기 다른 세상 사람으로 보인다.)

어쨌든 나의 이런 선택에 다른 사람들이 엄청 머라 했어요. 대학원까지 나와서 논문으로 표창도 받은 사람이 유학도 마다하고 학원 강사를 한다고. 나는 그냥 어쩌다가 대학원으로 간 거고 상을 받고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거거든요. 나한텐 그게 아쉽지도 않고 소용이 없는 거예요. 해석은 다른 사람들이 다르게 하죠.
(맞다. 내가 안 행복하면 남들이 보는 훌륭한 조건이 중요하지 않다. 내가 행복한 것이 먼저다.)

원래 교수가 꿈이었고요, 완벽한 사람만이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 꿈을 입 밖에 내지 않았죠. 사교육에 몸을 담았지만 저는 그 일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너무 좋은 거예요. 게다가 학원에서도 엄청 좋은 선생님을 만났어요. 특목고 반도 몇 년을 맡았고, 정말 신나게 달렸죠. 사십 전에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어쩌다 보니 작은 학원을 운영하게 되었어요. 수학이라는 하드한 과목을 푸른 정원이 내다보이는 곳에서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었어요. 또 다들 반대했는데 열심히 일을 만들어 학원을 운영했어요.
나는 리더로서 총대를 매는게 자신이 없었는데, 주변에서 내 강점이 못하는건 솔직히 말하고 도움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태도랬어요. 그래서 했죠. 그렇게
학원도 한 3년 하니깐 정상으로 올랐을 즈음 돌아보니 딱 십년이 되었더라고요. 쉬고 싶었고 그렇게 정리해서 나왔어요. 아름다울 때 떠나왔죠. 


나는 사람을 통해 행복한 사람이란 걸 알았죠.

내가 행복한 것이 뭘까를 많이 고민했어요. 돌아보니 나는 도움을 준 사람이 있었어요. 그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 년을 잡았어요. 내 몸은 항상 바빴어요. 늘 바빴고 시간이 없었고, 친구들 돌잔치가 있거나 몸은 못가니 부주를 했어요. 산티아고를 다녀오고 나서 남은 안식년 동안 친구들에게 감사하는 시간을 만들어보자, 했어요. 고마운 게 내 친구들은 나에게 와줬어요. 이제는 그들의 삶의 장소에서 한번 가서 봐야겠다. 해서 정말 찾아갔어요.

저라는 사람의 내가 행복한 것이 무엇인가를 한참 생각했어요. 나는 사람을 통해 행복한 사람이에요.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결국 사람이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나를 봐주었듯이 나도 그 사람들의 행복에 관심을 갖고 지켜봐줘야겠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다른 꿈이 있어요. 공교육과 사교육. 스토리가 있는 학원을 만들겠다는 마음에 움직였죠. 
스펙. 중요하지 않아 스토리를 만들어. 니가 이걸 왜 하는지 왜 하고 싶은지 왜 말을 못해. 어떤 의사가 되고 싶은지. 의사가 기술자. 나는 이제 아이들에게 스토리를 주고 싶어요. 그 사람들하고 같이 일하고 싶어요. 내가 행복해지는 건 고생을 해도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즐거운 이 사람이 이뤄내면 나도 돕는 거구나, 삶은 도움을 주고받는 거구나. 관점이 바뀌는 계기가 되는 거죠. 


그러니깐 내가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나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고 내 나이쯤 되면 있는 사람을 관리하지 새 관계에 투자 하지 않아요. 그래도 내가 나온 이유는,  현진씨가 말한 것 때문이에요. 내가 도움 받은 만큼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자는 말에 마음을 움직였어요.
예전에 지리산에 충동적으로 갔어요. 친구랑 갔는데 그 친구가 발목을 다쳐서 저 혼자 정상에 올라가게 된 거죠. 그런데 초짜가 초반에 막 올라가서 내려올 힘도 없는 거예요. 돈이고 짐이고 모두 친구한테 있고. 해는 져가고...
그러다 은인을 만났어요. 힘도 하나도 없이 주저앉아있는데 그분이 먹을 걸 줬어요. 저 양갱 정말 싫어하거든요. 근데 그걸 벗겨먹을 힘도 없어서 그분이 벗겨서 입에 넣어줬어요. 눈물을 흘리면서 먹었는데 세상에서 그렇게 맛있는 양갱이 없는 거예요. (웃음) 거의 업혀서 내려왔는데 그분이 끝내 사례를 거절했고 고마운 맘이 든다면 다른 분께 같이 베풀어 주세요.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게 그 도움이 저는 또 산티아고에서 느낀 거예요. 그래서 이 이야기가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생각해요. 

두 번째 이유가 있어요. 이년이 다 되가는 시점에 왜 박현진씨가 나한테 연락을 했을까. 생각을 해 봤죠.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쯤에서 나도 내 삶을 정리해 보자는 결론에 이르는거죠.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가면 좀 더 담백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나도 말하면서 나를 정리하는 거니까...

최근에 일을 새로 시작했어요. 내가 어려울 때 나에게 와준 사람이 도움을 요청했어요. 그래서 나도 돕기로 했죠.
이 사람들이 그리는 꿈이 좋아요. 나도 내가
내가 잘 될 때 박수 쳐준 사람들이 아니고, 내가 힘들 때 와서 도와준 사람들. 그 사람들하고 같이 가고 싶어요. 일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들과 일을 하면 고생이 아니라 행복인거고요.
이 사람이 이뤄내면 나도 이뤄낼 수 있을 것 같고, 그리고 돕는거구나...
이 친구가 나에게 '스토리가 있는 학원을 만들어보자'라고 제안했고, 다른 화려한 제안들을 굳이 물리치고 이쪽에 합류했어요.
대치동은 정말 개인주의예요. 여기는 정말 돕고 돕는 구조예요. 함께 라는 마인드가 너무 좋아요. 이 사람들이 그리는 꿈이 좋아요.  개인적인 인생사까지 살펴보면서 함께 가는. 혼자 사는 건 힘들어요. 내가 이렇게 지나온 것도 도와줬기 때문이에요. 

산티아고 다녀온 전과 후 달라진게 뭐냐고 물었죠? 달라진건 없어요. 다만 사람이 인생을 사는데 있어 과거의 경험을 베이스로 미래를 사는 거거든요. 이제 돌아보니까 산티아고의 경험으로 내 다음 스템도 비춰지는 거예요.
산티아고에서도 아무것도 없이 갔다가 사람들을 만났고 좋았잖아요. 그 경험들을 미루어 앞으로 있을 일들을 헤쳐나가것도 좋겠다. 좋을 것이다. 라는거고, 선택 이후의 시간이 더 중요하다. 나는 이 사람들과 함께 노력하겠다..는 거죠.
그게 내 행복인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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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세 시간 넘는 인터뷰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한동안 노트북 앞에 앉기가 쉽지 않았다. 대화 내용이 사라지기 전에 옮겨 적어야 하는데 왜 미루는 걸까. 세 시간의 이야기가 나는 너무 소중했고 이야기 듣는 게 재미있었는데도. 
아마도 내가 받은 이야기가 너무 컸기 때문이리라.  그 긴 시간을 일일이 되불러 적을 수도 없고, 어떤 부분을 발췌할 수도 없고, 흐름이 잘 전달되도록 만들어내야 하는데, 초보 인터뷰이로는 참 어려운 일이다.
이 십 여년의 인생 이야기를 아무 조건 없이 해주신 것도 고마웠다. 그 고마움을 표현하기가 망설여진다. 

모든 사람들이 도와준다던, 운이 좋았다던, 자신이 가진 것 보다 더 높은 가치평가를 받아왔다던 그녀가 결코 운으로 살아온 게 아니었음 안다.
부족한 부분을 보이고, 도움을 요청하기를, 고마움에 크게 감사할 줄 아는 모습이 인간적이다. 아무 조건 없이 나에게 이야기를 풀어놓아 준 그녀가 좋아졌다.

그럼 현진씨의 키워드는 뭐예요? 질문을 받던 그녀가 끝내는 나에게 질문을 해준 것도 고맙다. 
내가 정말 뭘 원하는가 하는 것. 지금 어쩔 수 없이 외롭다는 것. 글을 잘 써보고 싶은 것. 이 말을 차근차근 되집어 주었다.또 한
나의 외로움을 깊이 공감해주었던 것도. 내가 대여한 공간에 감탄을 해주었던 것도 감사하고 몇 달 만에 얻은 주말의 휴식 한 가운데 시간을 내어준 것도 감사하다.

본인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면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다던 고집스러움에, 
너의 꿈을 이루자고 같이 가자고 한다면 나의 꿈은 물어봐 주어야 한다는 상식에, 
현실의 가치가 '돈'이 으뜸이 되고 다른 가치들이 묻혀버리는 것에 안타까워 하는 마음에 동감한다.
이 년 전 잠시 맺은 인연을 되불러내어 나의 엉뚱한 인터뷰 요청에 답해준 이 인연이 욕심난다.
어니스트 톰슨 시튼의 '인디언의 복음'이란 책에 실린 '늙은 인디언 양파 장수' 이야기를 하며 인터뷰를 정리할까 한다. 



멕시코 시티의 큰 시장 한 그늘진 구석에 포타 -- 라모라는 나이든 인디언이 있었다.
그는 그 앞에 20줄의 양파를 매달아 놓고 있었다. 시카고에서 온 어떤 미국 사람이 다가와서 물었다.
"양파 한 줄에 얼마요?"
"10센트입니다."
"2줄은 얼마요?"
"20센트입니다."
"3줄에는 얼마요?"
"30센트."
"그래도 깎아 주지 않는군요." 그 미국인이 말했다.
"25센트에 주실래요?"
"아뇨."
"20줄 전부는 얼마에 파시겠습니까?"
"나는 당신에게 20줄 전부를 팔지 않을 것입니다."
"안 판다고요? 당신은 여기에 양파를 팔기 위해 있는것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나는 내 삶을 살려고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이 시장을 사랑합니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붉은 서라피(멕시코나 중남미에서 어깨걸이나 무릎덮개 등에 쓰는 색깔이 화려한 모포)를 좋아합니다.
나는 햇빛과 바람에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사랑합니다.
나는 페드로와 루이스가 와서 '부에노스 디아스'라고 인사하고 담배를 태우며 아이들과 곡물에 관해 얘기하기를 좋아합니다.
나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런 것들이 내 삶입니다. 그것을 위해 나는 종일 여기 앉아서 20줄의 양파를 팝니다.
그러나 내가 내 모든 양파를 한 손님에게 다 팔아 버린다면, 내 하루는 끝이 납니다.
그럼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다 잃게 되지요.
그러니 그런 일은 안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