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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획&기록/산티아고BuenCamino

[Buen camino] 오늘은 혼자 산 속 안개에서 길을 잃었어


2009.11.10
산 후안 드 오르테가-부르고스 : 26km


오늘 날씨는 어제보단 조금 나았다.
3킬로도 안 되는 길을 가뿐하게 주파. 이곳에 하나 있던 알베르게는 문을 닫았다.
어제의 알베르게에서 묵기를 잘한 일이다. 카미노에는 정보 공유가 쉽다.
다들 머무르는 곳이 비슷하기에. 아파르는 작은 마을이고 브루고스까지 21킬로가 남았다.
숲길 고개를 넘어가야 한다.
딸깍 발을 디디는데 엄청 커다란 개가 묶여있지도 않은 채로 앉아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의례히 컹컹 짖어댈 거란 나의 조바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나에겐 아무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먼 산을 바라봤고,
울타리 안에 있던 수십 마리의 양떼는 떼거지로 경계망 사이로 다가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개는 양때에게만 관심이 있는 양치기 개였던 것이다.

다른 개체들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지키는 것. 양떼 주인은 그래서 맡겼겠지.  
질척이는 길에 수많은 발자국을 보니 군데군데 개 발자국 
무수한 반복되는 옴폭한 발자국은 양떼, 턱턱 올려진 동그란 건 개의 발자국.
커다란 초코볼을 흩뿌려 놓은 듯한 무수한 양의 똥무더기들은 옵션이다.
 


이곳의 날씨는 정말 예감 할 수 없다.
조금 전에 보고 온 양떼를 지나 오 분도 안 지났건만 바로 안개가 자욱하게 끼기 시작했다.
마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안개 가득한 풍경.
실루엣으로 보이는 나무와 표지판의 드라마틱한 풍경도 잠시, 곧 공포감이 찾아왔다.
불과 10미터 앞도 안 보이는 상황.



띄엄띄엄 보이던 팻말도 사라지고 이제 노란 화살표는 보이지 않는다.
그 와중에 또 비가 내린다. 앞이 보이질 않으니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본능적으로 내려가는 길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이 지금 고개가 가장 높은 곳이니 흙길을 따라, 발자국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곳을 따라 나도 나란히 걸었다.
멀리서 땡깡땡강 깡통종소리가 들린다. 어느새 아까 본 양때가 내 곁에 와 있다.
양들은 건초를 찾아, 나는 길을 헤메다가 같은 길에서 만났다. 별 경험을 다 하는구나.


▲ 야속하게도 안개속으로 먼저 사라저버린 순례자. 나중에 말을 트게 되었던 안토니오.


멀리서 분명 공사현장에서나 들릴법한 소음이 들린다.
안개가 심해 앞이 보이지않으면 문명의 소리를 찾아 가면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양때를 벗어나 그쪽으로 내딛기 시작했다. 곧 트럭 지나 가는 소리도 들린다.
그때부터 길을 따라 내려갔다.
저 멀리 마을이 보여서 안도감이 들지만 오늘 일정대로라면 브루고스까지는 어떤 마을도 나타나선 안 되었다.
표지판 상으로 마을 이름은 루베나. 길을 한참 잘 못 든 것이다.

10시. 30분 정도 안개 속에서 헤맸을 뿐인데 온몸의 에너지가 다 소진됐다.
일단 마을 바에 들어가서 배부터 채워야 했다.
바에 준비된 음식이 하나도 없었다.
바텐더에게 바디랭귀지로 배와 입을 가리켰더니 잠시 고민하더니 화장실 키를 내어 준다.
아니 이게 아니야~~ 이번엔 좀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배를 문질렀다.
역시 고통을 표현하는 데는 의성어와 실감나는 표정이 최고의 커뮤니케이션 도구다.
주인이 바게트를 가져와서 반으로 쪼개는 시늉을 한다.
그 안에 먼가를 넣어서 샌드위치 비슷한 걸 만들어 준다는 소리 같다.
나는 아무거나 오케이 했다. 뭐든 먹을 걸 달란 말이다....
바게트 샌드위치가 나오자 나는 자랑스럽게 주문해댔다. 카페 콘 라체, 그란데!!!
다시 원기를 회복하고 브루고스 방향으로 걷는다.
내가 선택 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고속도로 갓길뿐이다.
아까 문명의 소리라며 반가워하던 마음도 잠시.
엄청난 속도와 소음과 바람을 남기며 지나가는 트럭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다.
어제 밤 유용히도 사용했던 귀마개를 다시 꺼냈다.
이 길을 적어도 두 시간은 가야한다.
마지막 카미노 길이 고속도로라니 원통했다.





오늘은 홀로 산길에서 안개를 만나 길을 잃었어.
곧 마을을 찾았지만,
여행은 한 편의 모험 같아.


어제 읽은 가이드 북에서 브루고스엔 공장지대가 많아 순례자들도 몇 킬로는 버스를 이용한다고 써있다.
안개 대신 공장에서 나오는 연기가 그득하다.
이 근처에서는 카미노 가는 길을 아무도 몰랐다.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기에 조금 당황했지만 지금까지 오던 방향으로 계속 걸었다.
브루고스는 철도 항공시설까지 있는 대도시다.
버스가 다니기에 이번엔 버스를 타기로 했다.
정거장 앞에서 산티아고, 무니시팔 알베르게, 버스를 반복했더니 1번 버스를 타라고 알려준다.
한 노인이 내 가방에 붙은 조개 껍대기와 진흙범벅인 신발을 가리키며 뭐라고 한다.
순례자니깐 걸어야 하는게 아니냐는 뜻이다. 베시시 웃어주었다.
'고속도로에서 차들의 소음에 시달려서 지금 제정신이 아니에요.
안개에서 길을 잃은 후 나의 노란 화살표는 단 한 조각도 보지 못했다구요...'
그분 뭐라고는 했지만 친절하게 나를 알베르게까지 안내해 주었다.
친절함이 너무 감사하여 가방에 꼬깃하게 둔 핸드폰 매듭 고리를 선물했다.
기뻐하며 받으셨다. 아디오스...
이곳 알베르게는 거의 개인실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각 침대 머리맡에 개인 전등이 설치되었고 칸막이가 존재한다.
고작 3유로에 이런 시설을 사용하니 고마운 생각까지 든다.




부르고스에선 생장에서 부친 내 삶의 6킬로그램이 기다리고 있다. 
내 욕심과 집착의 무게 6킬로그램. 그것 없이도 지금까지 잘 걸어왔는데.
필요 없는 것들은 이곳 알베르게에 기부해야지.
하지만 반가운 물건도 있다. 바로 볶음 고추장. 우체국 가는 길을 그래서 즐거웠다.
고추장을 찾아서 참치캔과 양상추를 사서 싸먹어야지. 으흐흐..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고추장 타령인가 싶다. 
양파, 마늘 추가해서 양상추에 참치 얹어 고추장 듬뿍 뿌려 먹었다.
코 끝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도는 것이 몸에서 열기가 오른다.
한국의 맛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갈등이 생긴다. 대성당도 찬찬히 보고 싶고, 공원에서 더 멍 때리고도 싶고....
카미노의 길을 하루 더 연장 할까 말까...



2009 santiago de compost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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