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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en camino] 단 일주일이면 어떠한가 싱그러운 바람만으로도 족하다

코치 박현진 2009. 12. 9. 18:19


2009.11.08
칼즈-벨로라도 : 23km


초반부터 비다. 앞으로 삼일간 비가 온다는데 징하다.
오늘 중간중간 마을이 있으니 비가 심하게 내릴 경우 벨로라도 까지 무리해서 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 달 휴가를 신청하고 항공권을 발권할 때부터 지금까지 세세한 계획은 없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리턴일만 정해두고 카미노 길 위에서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할 생각이다.
카미노에 겨울은 이렇게 오고 나는 이제 서서히 카미노 여정을 마무리 해야겠다.

같이 일주일을 걷고, 홀로 일주일을 걷고, 또 일주일은 홀로 대도시를 여행하고
나머지 사흘은 유럽을 오가는데 시간을 쓸 것이다.




첫 번째 마을 그라농에서 카페 솔로 한 잔을 마시고부터 비바람에 발걸음을 옮기기도 힘들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빗방울이다.
바람의 속도에 묻어서 오는 빗물이라 막을 수도 없고 앞을 바로 보기도 힘들다.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 길에 빗물은 또 어찌나 고이는지...

이번 마을에선 초입부터 알베르게 간판으로 유혹하더니 결국 문을 닫은 곳이었다.
이젠 별수 없다. 벨로라도 까지 죽자고 걷는 수밖에. 7킬로가 남았다.
이 비바람이 계속 분다면 3시간 이상은 걸어야 하는 마당에 오기가 발동했다.
물찬 장화로 변신한 내 등산화를 바라보며 그냥 빨리 걸어서 몸에 열을 내야 감기에 걸리지 않을 것 같다.

발도 이젠 다 나아서 쩔둑 대지 않고 몸 컨디션도 좋지만, 이번엔 추위가 장난이 아니다.
출발로부터 2주도 안 지난 마당에 날씨가 이리도 차가와진다더냐.


▶ 비바람과 따뜻한 태양볕 경계가 분명한 하늘. 먹구름 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기분은 영....
저속으로 들어가면 비바람이 내리칠것이 분명하다.


보통 걸음으로 3시면 도착할 거리를 오늘은 6시가 다 되었다.
샤워를 하며 보니 비바람에 젓은 허벅지며 종아리가 빨갛게 부었다.
거울을 보니 입술까지 검게 변한 검둥이가 있었다.
 
감동의 라면스프 파스타를 끓여먹고 이층침대로 올라가려고 보니
거북이 부자가 내 아래채에서 곤히 잠들어 있다.


굳은살은 구원이었다.
드디어 몸과 머리가 분리되어 각자의 기능을 하는 경지에 도달했다.
물집 잡힌 발바닥이 굳은살로 변하면서 오히려 걷는데 도움을 주고 있었다.
육체의 고통이 더 이상 머리를 지배하지 않는다.
발바달이 쏴아 해지도록 걸으면 머리는 이내 이런 생각으로 꽉 찬다.
'발바닥 아프다. 어떻게하면 다리가 덜 아프게 걸을수 있나,
아 배고프다...커피 마시고 싶다..내가 왜 여기 왔지..??' 라는 참으로 원시적이고 즉물적인 생각.

그런데 요 며칠 카미노를 슬슬 떠날 생각을 하면서 
육체의 고통이나 수고와는 별도로 '다른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때의 상념들을 간단히 메모해본다.
 
무의식적으로 걸으면서 든 생각은 이런 여행을 계속 하고 싶다는 것.
홀로여도 좋고 같이여도 좋고. 지금 배낭 여행의 맛을 보고 흥분해 있는거다.
여행을 안다녀 본 것은 아니지만 길 위에서의 생활을 이만큼 해 본 적이 없지 않은가.
하루 8시간 이상을 며칠 내리 걷는 다는 게 일생을 통틀어 겪을 일이 얼마나 될까.
지금처럼 작정하지 않는다면.
그러다가 최소한의 비용, 겸허한 마음, 가벼운 발걸음으로 시작하는 이 길 위의 생활이
결국은 일상에서부터 많은 시간과 비용을 지출한 결과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나는 힘겹게 온 만큼 무리를 해서라도 완주라는 것을 해야 하는 것인가.
끝을 내야 하는가. 끝의 정의는 무엇이라도 있는것인가.




카미노를 꿈꾸는 사람들.
나처럼 비용에 구애는 받지 않아도 한달이 넘는 시간을 낼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어쩌면 꿈으로만 남기거나, 혹은 직장을 때려치고 오기도 한다.
카미노. 걸어보니 40여일을 투자해서 완주해야 할 이유 없다.

비장한 마음으로 사표를 던지고 수십일을 나올 필요도,
금메달 걸린 마라톤 코스를 완주해야만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싱그러운 경험 한 조각 얻어가는것으로도 나쁘지 않다.

어쩌면 이 여행은 그런 생각에서 출발한 것인지 모른다.
여행.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잖아!!!
한번 느껴보자는...
그리고 잠시 일상에서 탈출하고 내 생각에 잠기는 것만으로도
카미노를 충분히 경험 할 수 있다는것으로 정리해본다.



2009 santiago de compost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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