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생활의 발견

직딩이여, 점심에 소풍을 떠나라!

코치 박현진 2012. 2. 14. 17:38

내 뒤로 남산타워가 보인다. 회사 이전으로 용산으로 출근한 게 벌써 8개월째다. 이 주변에서는 어디로 보나 남산타워가 보인다. 너무했다. 서울의 상징 남산타워를 그렇게 무시했다니서울에서 태어나 서른하고도 몇 년을 서울을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음에도 서....람인 나는 용산구에 무슨 동네가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회사의 주소지가 갈월동이니 그것만큼은 기억하는 정도.

어느 날 '후암동'을 알게 됐다. 미끈한 여자대학의 거리에서 탄 마을 버스는 끝도 없이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갔다. 한참 올라가면 거기에 남산타워가 내려다보고 있다. 해가 지고 발 아래로 야경이 펼쳐지는데 끝내주게 멋있었다이런 길을 두고 지하로만 다녔다는 거야?

오늘 점심시간에는 남다를 프로젝트를 하기로 결심했다. 한 시간은 ''의 집착에서 벗어나 후암동 런치타임투어를 떠나자. 런치타임투어 프로젝트 이름만 거창하지 별거 없다. 회사 뒤로 보이는 길 아무거나 선택해서 골목골목 걸어보는 거다원칙은 간단하게 정했다. 길은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갈 것지도는 보지 말 것. 목적지를 정하지 말 것. 길을 잃어도 당황하지 말 것택시 타면 되니까.

예상대로 후암동의 뒷골목은 새로운 길이었다가을 낙엽을 긁어 태울만한 마당이 딸린 저택도 있었고 시멘트로 대충 발린 채로 문과 창문만으로 겨우 집이라는 것을 인식하게끔 하는 집도 있었다.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만한 통로도 있었고, 아슬아슬한 보폭의 계단도 있었다., 학교, 병원, 연구소, 목욕탕... 거리마다 동네의 다양한 모습이 보였다삼십여 분 발길 가는 대로 다녔을까한참을 올라간 느낌이 들 때 나는 드디어 길을 잃었다. 남산타워는 조금 더 가까워졌고 코 앞에는 어마어마한 높이의 계단이 있었고 (나중에 찾아보니 이름하여 후암동108계단이라고 한다.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의 배경이 되기도 했나 보다.) 계단을 다 오르고 또 언덕을 넘고 나니 더는 올라갈 데가 없었다. 점심시간 10분을 앞두고 물었다. '여기가 어디에요?' '해방촌 오거린데요.' 순간 정신이 몽롱해진다. 21세기 한복판에 해방,촌 이라는 어색한 울림. 나는 어찌 어찌하여 해방촌에 와 있는 거다해방촌이 지척에 있었던 거구나. 서둘러 택시를 탔다. 50분의 산책이 무색하게 택시는 오분 만에 평지로 내려왔다.

점심, 낫선 여행을 떠나보라. 나처럼 새로운 공간을 파악한다면 좋겠지만익숙한 거리라도 다른 길로 걸어보라골목 안 일상적인 풍경은 이 시간 만큼은 여행지가 된다이렇게 헤메다가 마약을 풀어 만들었다는 마약 떡볶이 집에서 떡볶이를 맛보거나 우연하게 드라마 촬영지를 발견할지도 모른다일상탈출의 거대한 결심도 아니고 소박하게 점심 한끼와 바꿨을 뿐이다늘 먹던 밥과 교환한 것 치곤 꽤 신선한 경험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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