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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

[Buen camino] 하룻쯤 더 머물러도 좋아 2009.11.03 어젯밤 파티를 같이 보낸 사라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오후의 한가로운 때를 즐기고 있다. 아침에 빨래도 하고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식재료도 사오고 동네도 어슬렁거리다. 한국인 남자사람이 쉬어간다며 들어왔다. 문득 내 노란 슬리퍼에 시선을 두더니 독일인 마크 이야기를 한다. 노란 신발의 한국 여자 이야기를 했나보다. 첫날 피레네 산맥을 못 넘고 있는 나를 경찰에 신고해 준 친구다. 소문이 거기까지 퍼졌나? 카미노에서 나의 정체는 '노란슬리퍼를 신고 피레네에서 퍼졌던 그래서 실종신고됐던 한국여자'가 된 것이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느리지만 잘 간다. 빨래 말리고 식사하고 발의 물집 처리하는데 벌써 한 시다. 아 이곳에서의 시간은 느리지만 잘 간다. 앞으로 남은 2주일을 보낼 계획을 세워보지만.. 더보기
[Buen camino] 드디어 친구가 생기다 2009.11.02 에스텔라 - 로스아르코스 : 21.8km 어제 비가 온 뒤 제법 쌀쌀해진 기온으로 상쾌한 걷기가 시작되었다. 새끼발가락 물집을 실리콘 밴드로 동여매고 만반의 준비로 걷기 시작했다. 날씨가 변덕이다. 첫 번째 고개를 넘어서자 먹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내리쬔다. 황토 빛 땅이 환하게 개고 맑은 하늘이 드러난다. 반가운 산티아고 길의 날씨다. 두 번째 고개를 넘어서자 바람이 마구 불기 시작한다. 갈대길 사이로 갈대보다 더 흔들리는 바람이다. 그리고 슬슬 춥다. 땀이 나기도 전에 식어버렸다. 그래도 비를 맞고 걷게 되지 않음에 감사하나 어찌나 바람이 세게 부는지 발걸음을 옮기기도 힘이 들 정도다. 이때 나의 장갑과 귀가리개가 딸린 모자가 위력을 발한다. 물론 바람막이가 되어줄 나의 주황색 점퍼.. 더보기
[Buen camino] 불타는 발바닥을 지긋이 즈려밟고 2009.11.01 푸엔테 라 레이냐-에스텔라 : 22.4km 오늘은 불나는 발바닥과의 투쟁기가 되겠다. 발바닥 뒷굼치 굳은살에 자리 잡은 두터운 물집, 전체적으로 발을 조이는 등산화 덕에 살을 파고드는 엄지발톱의 고통. 그리고 자꾸 새로이 잡히는 발바닥의 부분적인 물집들. 가장 힘든 건 발을 디딜 때 마다 느껴지는 발바닥 통증이다. 발바닥 뼈로 바로 다가오는 통증들. 오늘은 일행들 중에서 맨 꼴찌로 걷곤 했다. 가끔은 걷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만사가 귀찮다. 발바닥만 괜찮다면 14 킬로의 짐도 견딜 수 있다. 불타는 발바닥을 느끼며 신선놀음 하던 나는 드디어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나 왜 여기 있는거니?? 발바닥에 물집까지 잡혀가면서 이곳에서 떠날 생각도 못하고 있는 나는 뭔가. 출발 기세대로라면 '즐.. 더보기
[Buen camino] 나의 피로회복제 코카콜라, 에스프레소 2009.10.31 팜플로냐-레이나 : 23.5km 오늘은 페르돈 고개를 넘어야 한다. 길은 평탄하고 오늘의 날씨는 덥다. 수확을 다 끝낸 밭은 황토빛 일색이고 하늘은 맑다. 어제 알베르게에서 눈인사를 나눈 순례자와 말을 걸어온다. 호기심이 가득 담은 표정으로. 이 길을 걷는 스페인 사람들은 몹시도 궁금해했다. 동양 여자들이 어떻게 알고 이곳 까지 왔는지. 너는 이 길을 왜 걷니? 만나는 사람들마다 물어오지만, 나는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걷고 싶어서라는 늘 하던 말 대신 오늘은 다른 말을 해본다. "파울로 코엘료의 책을 봤어. 그리고 이곳으로 왔지." 한 달의 휴가를 내고 생활하기도 빠듯한 월급을 쪼개서 이곳으로 온 이유? '그냥' 대신에 이유를 꼭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700유로.. 더보기
[Buen camino] 이것이 진짜 여행이렸다 2009.10.30 수비리-팜플로냐 : 21km 드디어 처음 제대로 걸어보는 날이다. 공립 알베르게 대산 10유로나 하는 사설 알베르게에서 묵었다. 만족도는 높았다. 토마토 한 알과 카페 솔로 그랑데 한 잔으로 가볍게 시작. 아침에는 이슬에 젖기 때문에 바람막이용 점퍼를 입어주어야 한다. 핑크 자켓은 항공좌석에서 놓고 내리고 내게 남은 유일한 바람막이용 점퍼는 여박 점퍼. 주황색 옷은 어디에다 내어놓아도 튄다. 산에서 실종되어도 가장먼저 발견될듯. 인적 없는 숲길, 아침이슬에 옷깃을 스키며 산길을 따라 걸음을 옮긴다. 중간에 검은 고양이가 튀어나와 따라온다. 야옹대는 폼이 영 애태우는 걸 보니 녀석이 오랫동안 굶었던 것 같다. 갖고 있던 바게트 빵을 좀 찢어서 던져 주었다. 이틀 전 사두고 거의 잊었던 .. 더보기
[Buen camino] 산티아고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 2009.10.29 생 장 피드 포드 - 수비리 : 21km 어제의 약속대로 짐을 부치기 위해 마리아를 찾았다. 책, 배낭커버, 화장수, 여분의 바지도 1킬로가 나가길래 뺐다. 양말도 한켤래로 빨아신기로 했다. 그렇게 6킬로 감량에 성공. 그럼에도 저울에 잰 배낭무게는 14킬로...다들 혀를 내두른다. 카메라 2kg, 침낭2kg, 노트북 1.5kg, 그들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아답터 무게가 1kg,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노트북과 카메라는 포기 못하겠다. 그러니 이 부분은 내가 감내해야 할 무게였다. 9시 우체국 문이 열 때까지 마리아와 기다렸다. 십 오분 전 마리아는 테이프와 가위를 가지고 나왔다. 문이 열리기 전의 우체국 앞에서 나를 세워두고 빈 박스를 구하러 총총히 사라졌다. 한국까지의 배.. 더보기
[Buen camino] 파리를 지나 생장으로 2009.10.27 프랑크 푸르트 공항의 환승거리만큼이나 파리 지하철의 환승도 환상적으로 길다. 야밤에 도착해서 씻고 어쩌고 다음날 일찍 기차역으로 향하느라 파리의 본 모습은 못 본다. 아침은 민박집에서 한식으로 제공한다. 밥,국,메인 반찬 1에 사이드 반찬 몇 가지를 제공하는데 당분간 구경하지 못할 마지막 한식인지라 열심히 먹었다. 바욘까지 TGV를 타고 생장까지는 갈아타야한다. 열차가 나란히 두 대 있는 것을 모르고 한 대만 해당 량을 찾느라 앞에 있는 차를 놓칠 뻔하다. TGV 고속철답게 귀가 멍멍하다. 검표원 한번 지난 후 별다른 사건은 없다. 6시간을 달리고 달려 환승 한 번 하고 또 1시간여를 달리면 생장이다. 생장이야말로 내가 드디어 유럽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해준다. 순례길 문턱에 첫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