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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기록

훈훈한 이야기


Intro.
 
어제 송년회겸 모임.
그 나물에 그 밥.
근무하고 그 인원 그대로 모임.
 
#1.
2차로 일식주점을 갔는데,
메뉴판에 정종이란 글자가 눈에 꽂히더라.
오랫만에 옛날 술이라고 생각되는 과거의 낭만을 탐하느라
사케 한잔을 주문했다.
 



 
나이가 들은건가. 술도 잘 못먹으면서 나는,
작게 덥혀져 나오는 따끈한 술을 좋아하게 되었다.
따뜻하게 데우는 과정에서 알코올은 어느 정도 휘발 되고
곡주 특유의 부드러움만 남는 것. 
 
취한김에 평소 멀쩡한 정신에는 욕하던 행위를 하고 말았다.
바로...정종병을 가져와 버린 것.
마치 전장에서 포획물을 획득한 것 마냥
의기양양해진 나는 조용히 2차의 문을 나선다.
 
 
#2.
들어오기 전만해도 싸락거리던 눈이
제법 눈송이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이 연말 술이 떡이 된 청춘들은 장거리 택시를 잡으러 혈안이고
기본요금뿐이 나오지 않을 나같은 손님은 거부당했다.
나의 무사한 귀가에는 당연히 관심이 없을 남성 동지들은
재빨리 지하철역으로 가버리고 나는 가방을 품은채
머리에 목도리를 두르고 추위에 떨었다.


 
  
#3.
그리고 발길이 닿는대로 눈앞에 보이는 미용실에 들어가서
순서를 기다리며 잡지책을 보다가
문득 머리를 짧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백화수복은 머리에서 떠나질 않고. 
내 머리속은 백화수복잔 세트가 나란히 세팅된 나의 방만을 떠올릴 뿐이었다.
 
#4.
대충~ 미용실에서 나와...흰눈을 밟고 맞고 녹이면서...
발길닿는대로 또다시 이마트에 들어갔다.
주류코너에서 너무나도 아름답게 자리한 백화수복 한병을 뽑아나왔다.
 
 
#5
시간은 11시 50분. 이마트 앞 택시가 가장 안잡힐 시간.
하는 수 없이 또 걸었다.
청주병을 옆구리에 낀 채로.
그렇게 백화수복과 다정히 걷는 길은  
덥수룩하던 머리가 한 큐에 날라간 뒷덜미의 시려움도 잊게 했다....
 
 
그러니깐 요약하자면 나는 어제
눈오는 날 청주를 한잔 들이키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백화수복을 옆구리에 끼고 
훈훈하게 귀가하여 
쌔빈술병세트를 방에 세팅하고 기뻐하였던 것이다.
 

2008 년 12월 23일 그날 이후로 나의 긴 머리는 짧은 컷으로 8개월간 유지 중...